그 날은 12월 답지 않게 날씨가 따뜻했다. 그래도 겨울인 건 변함이 없었고 추위에 유독 약한 테오는 볼이 빨개진 채로 몸을 부르르 떨며 식당의 작은 정원 입구에 발을 내디뎠다. 살짝 뻑뻑한 격자무늬 모양의 미닫이문을 열자 히터로 가열된 따뜻한 바람이 바깥 공기에 차가워진 코끝을 간질였다. 카운터의 직원이 곧바로 자신을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을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네요."
테오는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려 무언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올 거라서요. 2인실로 부탁드립니다."
직원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항상 드시는 걸로 가져다드릴까요?"
테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제일 인기 있는 코스로 가져다주세요. 아마 이런 데는 처음일 거라서요, 그 사람은.
직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네, 네에, 그럼 이쪽으로... 라며 2인실로 안내해 주었다. 직원의 반응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아담한 크기의 정통 한식 식당은 테오가 자주 찾는 단골 식당이었다. 주인과 잘 알고 있는 사이이기도 했고, 음식이나 조용한 분위기도 테오의 취향이었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식당이어서 이야기를 할 자리로 고른 것이기도 했다. 굳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거의 자신을 파묻다시피 한 큰 목도리를 짙은 회색 코트와 함께 구석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놓을 때 쯤, 방과 복도를 구분하는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일행분 오셨는데요..."
직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테오에게 알렸다. 긴장한 모습을 보니 요한이 유명하긴 한가보다. 테오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곧이어 들어오는 요한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런 데가 취향이신가 보네요."
요한은 초대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라는 말과 함께 테오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역시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테오를 쳐다보며 식탁으로 살짝 턱짓을 했다. 앉자는 뜻이었다.
테오는 앉자마자 입을 뗐지만 요한이 이를 눈치채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얘기는 나중에 해요. 우선 밥부터 먹죠."
테오는 입을 도로 꾹 다물었다.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기에 에피타이저가 나올 때 까지 도대체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 지 몰랐다. 그저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요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의 어두운 회갈빛 머리카락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겨울바람에 몇가닥이 흐트러져 있었다. 멀끔한 모습이 꽤나 신경을 쓴 듯했다.
요한은 잠시 업무를 보고 있는지 눈이 마주치자 미안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누군가에 메일 답장을 보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원래 저렇게 아무한테나 웃어주나? 가만히 앉아있는 요한을 쳐다보는 것도 질리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심이라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구름 사이로 힘 없는 햇빛이 옷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어루만졌다.
조금 구석진 곳에 있었기에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한산했으나 아담한 높이의 건물들 덕분인지 채광은 잘 들었다. 바람이 불고 있는지 구름이 조금 빨리 지나가며 마치 인형극처럼 해를 드러냈다 숨겼다 다시 드러냈다. 구름의 구멍이 미묘하게 햇빛을 빼꼼히 보여주며 테오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찡그리며 속눈썹을 깜빡였다.
햇빛이 얼굴에 곧바로 닿는 게 불편한 테오는 고개를 도로 식탁 쪽으로 돌렸다가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비치며 도로 핸드폰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았다. 테오는 뭐라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에피타이저가 들어왔다.
요한은 반색하며 여기다가 놓아 주세요, 하며 직원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저 사람 나 피하는 거지, 지금? 테오는 (늘 그렇듯이) 속으로 하, 웃으며 식탁에 가지런히 놓이는 음식들을 슥 훑었다. 역시 인기 코스라 그런지 대중성 있는 에피타이저만 골라놓았다. 살짝 아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느릿느릿 음식을 집어먹었다. 요한 역시 테오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나마 무난해 보이는 탕평채를 입에 넣었다. 몇 번 오물거리는가 싶더니 눈썹이 슥 올라가고 집어먹는 속도가 살짝 빨라졌다.
입맛에 맞나 보다. 테오는 내심 뿌듯했다. 자신과 눈이 또 마주쳤는데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맛있네요. 이런 걸 테오씨만 알고 계셨다니 조금 괘씸해지는군요."
농담 삼아 말을 툭 던지고 씩 웃어 보였다.
또다.
테오는 묘해진 기분을 떠안고 괜히 음식을 깨작거렸다. 그에 반해 요한은 즐거운 표정으로 테오씨, 이것도 드셔보세요, 저것도 드셔보세요 하며 음식을 테오 쪽으로 밀어주기 바빴다. 아이같이 해맑은 얼굴에 대놓고 거절하기 뭣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입안에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후식이 치워질 때 즈음 요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밥 잘 먹었어요. 다음에는 제가 한 번 살게요."
테오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이 조금 남은 접시를 쳐다보았다.
요한은 손 끝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더니 "음, 그럼 하던 얘기 마저 할까요?"라며 말을 다시 걸어왔다. 아마 계약 연애... 이야기인 듯했다. 어색해진 기류에 운동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테오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 말 안 하면 평생 못 해.
"... 죄송하지만,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요한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계속 눈을 내리깐 채로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요한씨 기대에 부응 할 자신도 없고요."
요한은 테오의 마지막 말에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테오씨가 연애 경험이 없는 건 저도 이미 알고 있어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 연애 말고 그냥 연애 하자고 할 걸 그랬나?"
테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알겠어요, 애초에 조금 무리한 것도 있으니까. 처음 본 사람이랑 섣불리 계약 연애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겠죠."
흐음,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한숨 소리에 불안해진 테오는 시선을 올렸다가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별로 상처받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우리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는 거죠?"
테오는 요한의 순순한 반응에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요한은 보라색과 주황색으로 물드는 구름을 쳐다보며 겨울이라 날이 금방 어두워진다며 나가자고 제안했다.
각자의 겉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가자 어둑해진 하늘에서 흰 가루가 깃털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떨어진 흰 가루들은 요한과 테오의 발 맡에서 금방 녹아버렸지만 금세 다른 가루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 눈 온다.
요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하나둘씩 켜진 전등이 요한의 얼굴을 비추며 명암을 드리웠다.
깨소금처럼 솔솔 흩뿌려지던 진눈깨비가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두 사람의 겉옷 위에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짐짓 다정하게 테오의 머리에 쌓인 눈들을 툭툭 털어냈다. 느껴지는 손의 온기가 마냥 싫지는 않아서, 테오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조심히 들어가요. 오늘 별로 춥지는 않았는데, 보아하니 추위를 타시는 것 같아서요. 옷 잘 챙겨 입고요."
요한은 테오의 목도리를 다시 매주고 살짝 벌어진 코트 앞자락을 꼭꼭 여며주었다.
"그럼 다음 주에 봬요. 촬영장에서."
테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동에 넋을 잃고 있다가 요한이 저만치 멀어졌을 때 즈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뭐야, 방금. 그 행동은 마치, 마치...
연인 같잖아. 연인같이 다정한 행동이었다.
며칠 전에 섹스파트너 제의 한 사람 맞아? 너무나도 태연해서 없는 일인 것만 같았다.
앞으로 얼굴 어떻게 보지.
테오는 추위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붉어진 귀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
나 이거 완결 ㄱㄴ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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