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ibacy: n. abstinence from sex.
금욕
"기사 봤어? 이번에 그..."
"테오도르랑 요하네스 말하는 거지?"
"응, 상상도 못했어. 정말이지..."
"요하네스는 그렇다 치고, 테오도르가..."
흥분된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수다를 떨던 두 직원은 등 뒤로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에 몸을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 지나가겠습니다."
직원들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후다닥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 망했다. 둘은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 직원들을 등 뒤로 한 채, 정작 가십의 당사자인 테오는 유유히 절망과 공포의 현장을 빠져나갔다.
테오도르 한(Theodore Han).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역 배우로 데뷔, 24살인 지금까지 여러 작품들을 쌓아오며 묵묵히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19년 차 유명 할리우드 배우.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연기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는, 신이 빚은 연기력을 갖춘 사람... 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엄청난 노력파이다. 아무런 스캔들도, 의혹도, 정말 아무것도 터진 적 없는 보기 드문 배우. 테오도르는 분명 성불구 일 것이다, 사실은 수도사가 되려는 거다, 등등 온갖 구설수가 나돌아다닐 만큼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젯밤, 한창 명성을 얻고 있는 신인 배우 요하네스 메란과 잤다.
그 플레이보이 요하네스와. 매일 밤 여자들을 끼고 논다는 사실이 자명해 이제는 클럽에서 그를 발견하더라도 놀랍지도 않을.
사실이 보도 되자마자 연예계가 들썩였다. 테오도르가 딱히 부정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난리였다. 그 둘은 영화도 같이 찍은 적 없는데. 아니, 접점도 아예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
세간은 테오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느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암, 그렇고 말고. 연예인이 스캔들 하나 없이, 성욕 없이 살 리가...
없나?
눈을 뜨자 시린 햇빛이 눈을 찔러왔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뻣뻣한 몸을 꿈지럭거리며 협탁 옆의 핸드폰을 확인 해 보니 현재 시각은 7시 4분. 커튼도 제대로 쳐져 있지 않은 방에서 흐릿한 주홍 빛이 어둠을 헤치고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 또 아침...
테오는 건조한 얼굴을 손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아침마다 축 늘어져 저기압이 되는 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하루를 살아 나가는 수 밖에. 침대에서 어떻게든 일어나 동기를 찾아야 매분 매초를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아, 오늘도 잘 견뎠구나,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반복한 지가 24년 째.
이것이, 테오도르 한의 '데일리 루틴' 이다. 별 볼 일 없지만.
테오는 눈은 떴지만 움직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한 채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런 상태로는 머리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체념한 채, 몸이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 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몇 분이 지나자, 비로소 어제의 기억과 자신을 강하게 꿰뚫는 위화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야.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솜이 물을 먹은 듯 무거운 몸을 겨우겨우 일으키자 주위가 핑 돌았다. 아, 어지러워.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내가 여길 언제 들어왔지.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옆자리에서 온기가 느껴져 쳐다봤더니, 웬 낯선 남자가 자고 있다.
반응속도가 느린 테오는 2초 동안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이내 깨울까 봐 소리도 못 내고 황급히 침대의 가장자리로 도망쳤다.
저 사람은 누구지? 이게 뭐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같은 침대에?
상황 파악이 도저히 되질 않아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옅은 검은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다음 스케줄까지는 2시간 26분. 빠른 속도로 시간 계산을 끝내곤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낯선 남자를 다시 내려다 보았다. 이 사람은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 같지는 않고... 일반인인가?
...속눈썹이 기네. 피부도 매끈하고. 조각같이 자는 모습.
홀린 듯이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려던 테오는 곧 자신이 뭘 하려고 했는지를 자각하고 곧바로 거두었다.
진짜 미쳤나봐. 아직 술 안 깼나?
양손으로 뺨을 찰싹 내리쳤다. 얼얼하니 정신이 확 들었다.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고 호텔에서 제공해주는 메모 패드에 쪽지를 휘갈겨 쓴 다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쪽지와 함께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에 두었다. 남자를 마지막으로 가만히 쳐다보던 테오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방을 나섰다.
어젯밤은 죄송했습니다. 호텔비는 제가 지불했으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지만 교통비 두고 갑니다. 혹시 배상을 원하신다면 밑의 번호로 전화 주세요.
010-XXXX-XXXX
"하아..."
로드 매니저는 한숨을 쉬며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대는 테오를 흘끗 쳐다보곤 몸을 돌려 운전대를 바로잡았다.
"그러게 내가 어제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지. 오늘 스케줄 꽉 찬 거 알아 몰라? 이번에 넷x릭스 새 시리즈 대본 리딩이랑 촬영 시작하잖아. 안 먹는 술을 마시겠다고 땡깡부리더니 꼴 좋다."
그거 아닌데... 차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퍼붓는 잔소리들에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묘하게 풀이 죽어 보이는 모습에 눈치 빠른 로드 매니저는 너... 무슨 일 있었어? 하고 물어봤지만 가볍게 무시당했다. 네가 그렇지 뭐. 하며 픽 웃은 매니저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검은 세단에서 내린 테오는 긴 운전에 살짝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로드 매니저의 배웅을 받으며 촬영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뭔가, 시선이 따가운데... 관심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긴 했지만 보통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쳐다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계곡의 민물고기처럼 금방 시선이 흩어지긴 했지만.
묘한 기시감을 뒤로 한 채 촬영장 근처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여기서 대본 리딩이 있으니 같이 연기 할 배우들을 보려나. 직원들이 분주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잘한 소음을 일으켰다. 6층에 있는 회의실에 도착을 했는데 층이 조용한 걸 보니 조금 일찍 왔나보다. 미리 들어가서 기다려야지, 하며 회의실 문을 열었는데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인사치레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어라?
테오는 몸이 사후경직 된 듯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지?
그래, 오늘 아침에 내 옆에서 자고 있었던.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자신이 두고 간 쪽지를 흔드는 그 사람이였다.
"안녕하세요, 우리 구면이죠?"
말도 안 돼.
"신인 배우, 요하네스 메란 인사 드립니다. 어차피 관심 없으시겠지만요."
"...아."
테오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요한은 그가 당황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채곤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시계 초침 소리가 점점 커지며 적막을 채웠다.
아무 말이 없던 테오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요한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제는, 죄송했..."
"왜 이래요. 자꾸 사과만 하시네."
요한은 말허리를 싹둑 끊고 들어왔다.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나른하게 뜬 눈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나요?"
테오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뇨. 필름이 끊겨서."
요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긴 회의실 책상에 미끄러뜨려 반대편에 서 있는 테오에게로 보냈다.
"그거 한번 읽어봐요. 기사." 라며 턱짓을 했다.
기사를 읽던 테오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테오도르 한과 요하네스 메란의 비밀스러운 밀회'. 우리 잤다는 거지, 지금? 어쩐지, 오늘따라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더라니. 이래서였군.
"저희 안 잤어요."
요한은 테오의 생각을 읽은 것 마냥 대답했다.
"테오씨가 꽐라가 돼 있길래 주소를 몰라서 호텔로 데려왔고, 마침 남아있던 방에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같이 잔 것 뿐이에요. 예상하신 것처럼요."
"그런데 왜 이런 기사가..."
"그거야 모르죠."
그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파파라치가 한명 붙은 것 같은데. 그래서 말인데, 저랑 연애하지 않을래요?"
"...네?"
아, 이번에는 제대로 당황했네. 표정을 숨길 여유도 없어 보였다. 요한은 느긋하게 등받이에 기대고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진짜 연애는 아니고요. 딱히 나쁠 것도 없잖아요? 테오씨는 성불구라는 소문을, 저는 플레이보이라는 타이틀을 떼는 거죠. 일종의 계약연애랄까. 어떻게 생각해요?"
테오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지금, 뭐라고? 연애를 하겠다고?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복도로 물밀 듯이 밀려왔다. 제작진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요한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정장을 툭툭 털고 살짝 돌아간 손목시계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테오 쪽으로 걸어오더니 자신의 얼굴을 귀에 바싹 들이댔다.
"잘 생각해봐요. 나쁜 조건도 아니니까. 결정하면 연락하세요."
조곤조곤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요한은 자신의 명함을 테오의 손에 쥐여주고 팔을 툭툭 두드린 뒤 사람들을 맞이하러 회의실을 나섰다.
테오는 어둑한 서재에 앉아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불을 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뚫어져라 종이 쪼가리를 쳐다보던 테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이런 제의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당연했다. 자신은 연애 상대는 커녕 섹스파트너도 없었고 그런 걸 둘 추호도 없었다. 사람들은 철통같은 테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나갔고 그런 상태를 유지한 지가 10년 째. 그런데, 그런데...
대담한 건지 무식한 건지. 지금 이 신인 배우라는 남자는 자신과 무려 계약 연애를 하자며 제안을 해오고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대체 뭐지. 테오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침대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테오는 과묵하고 초연한 듯 보였지만 사실은 거절을 잘 못 하는 약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오죽하면 매니저가 테오에게 '너 그러면 손해 보고 살거다'라는 말까지 했겠는가. 지인들을 잘 둔 덕분에 아직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아직까지는 이었다. 아직까지는.
이제는 테오가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미쳤다고 지인들에게 가서 이 망측한(?) 고민을 털어놓겠는가. 그 정도로 친한 지인이 없을 뿐더러 테오가 소소한 고민까지 다 털어놓는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저 꽁꽁 싸매고 혼자 감당하는 수 밖에.
끙, 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뱉은 테오는 급기야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냥 딱 잘라 싫다고 거절하면 될 텐데, 고작 이런 거 가지고 고민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생각해 보니 요한이라는 그 사람은 내가 거절해도 쉽게 포기할 만한 사람이 아니어보였지. 진짜 미치겠네.
가만, 계약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나한테 이득이 될 일은 없잖아? 오히려 손해 아닌가? 그런... 플레이 보이와 엮이면 명성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
근데 잘생기긴 잘생겼었지, 속눈썹도 길고, 피부도 도자기마냥 매끈했고...
그런 생각을 한 순간 테오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얼얼해지는 뺨과 함께 머리가 멍해졌다. 벌써 그 남자의 얼굴에 홀려 넘어가고 있었다. 안돼. 절대 안 돼. 무조건 거절해야만 했다. 테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미래의 자신 곁에 누군가가 있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 지 몰랐고 테오는 그런 불확실함을 싫어했다.
몇 초 더 고민하던 테오는 결정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 명함에 적힌 번호로 문자를 보낸 뒤 피곤했는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바로 곯아떨어졌다.
...
같은 시각, 샤워를 마친 채 가운을 걸치고 젖은 머리를 털던 요한은 핸드폰 알람음에 그 쪽으로 힐끗 눈길을 줬다. 이 시간에 누구야? 살짝 화난 표정으로 발신자를 확인하던 요한의 눈꼬리가 마법처럼 사르륵 접혔다.
내일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식당인데, 시간 괜찮으시면 와주세요.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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