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도 빠른 전개 want...
"컷! 네, 수고하셨습니다~"
테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송곳니로 씹으며 간이의자에 앉아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대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한겨울이었지만 촬영장은 액션씬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촬영 감독의 OK 사인이 떨어지는 소리에 올려다보자 사람들 사이로 땀으로 범벅된 요한이 가쁜 숨을 내쉬며 축축한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몸으로 때우는 액션씬인데도 재촬영을 도대체 몇번이나 하는 건지... 14번째에서 세다가 관뒀다. 이번 감독은 요한이 신입이라 군기 잡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깐깐한 완벽주의자인지는 모르겠다. 한숨을 폭 내쉬곤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이번 드라마는 범죄 스릴러. 원작은 몰입도도 높고 짜임새도 탄탄해 요새 베스트셀러인 소설이었다. 자신은여기저기에 몸을 담그는, 적이 많은 요원인 주인공 그레이 브로머 역할이었고 요한은 그런 자신을 쫓는 조직의 보스 역의 조연 세드릭 마스. 방금은 그가 주인공을 쫓는 과정에서 '잔챙이' 들이 나타나 싸우는 장면을 찍던 참이었다. 역시 젊은 게 좋아. 저렇게 개처럼 굴리는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어 보이고. 누구는 액션씬 찍으려고 몇 달 동안 체력훈련을 했는데. 테오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상반신을 담요로 꽁꽁 감쌌다. 다행히도 오늘치 분량은 다 찍어서 이렇게 편안하게 늘어져 있을 수 있다.
요한의 연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열정은 그닥이었지만, 캐릭터의 해석 자체는 괜찮았다. 그래도 너무 대본을 고수하는 대신 마음이 가는 대로 연기하면 더 자연스러울 텐데. 아. 이런 걸 꼰대라고 하는 건가. 멍하니 앉아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멀리서 요한이 스태프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들고 줄줄 흐르는 땀을 아무렇게나 닦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자신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뛰듯이 걸어왔다.
... 강아지 같네. 마구 흔들리는 꼬리가 잠시 보이는 듯했다.
"테오 씨."
요한은 눈을 찌르는 머리칼을 뒤로 다시 쓸어넘기고 테오 옆의 비어있는 간이의자에 털썩 앉았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가 갑갑한지 거칠게 풀러 손에 들었다.
"...응."
요한은 저녁 식사 뒤로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지키겠다는 듯한 각오로 끈질기게 연락을 해 왔다. 무른 테오는 그걸 고스란히 받아주었고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다. 선후배 관계. 요한은 테오에게 제발 좀 말을 놔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말을 놓게 되었고, 테오는... 여전히 테오 씨였다. 부담스러웠지만, 뭐 어쩌겠는가. 말 한다고 해서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이도 저도 않게 되어버린 상태.
"저 힘들어요."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는 거냐는 눈빛이 고스란히 보이자 요한은 눈꼬리를 올려 픽 웃으며 의자에 기댔다. 덩치가 워낙 커 간이의자가 초등학생용 의자 같아 보였다. 테오는 시선을 도로 대본으로 돌리고 요한은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다 정적을 깨고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이에요."
"뭐가."
"테오씨랑 저랑, 만나는 날이요."
만나? 나 내일 약속 없는데... 아, 드라마 말인가. 내일 촬영분에서 드디어 그레이와 세드릭이 재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음, 좋은 의미로서의 재회는 아니지만... 어쨌든 만나긴 하지.
"그... 렇지."
왜 저렇게 신나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잠시 쳐다보다 대본을 탁 닫았다.
"어차피 나랑 촬영장에서 항상 같이 있으면서 뭐가 그리 아쉬웠는데?"
"음... 테오씨가 연기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못 보는 게요."
테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내 연기가 그렇게 좋아?
"네. 좋아요. 정말로요."
갑자기 진지해진 그의 분위기에 테오는 어... 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냥 웃으면서 그럼요, 할 줄 알았지, 저렇게까지 진지해질 줄은...
...요한은 항상 자신의 예상 밖이었다.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랬다.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특기였다. 특기라고 해도 되려나. 만반의 준비를 해도 어떻게든 빈 틈을 찾아내 공략하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난 게임 속 NPC도 아닌데.
테오는 지금까지 속으로 몇번째 내쉬는 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라도 고맙네."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이상하고 이상한 사람이다.
요한이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테오는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이만."
할 말 많아 보이는 눈빛을 애써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하게 내버려 뒀다간 내 기력이 남아나질 않을거야. 저번에도 내버려 뒀다가 몇십분동안 이야기를 퍼부어댔다. 반짝이는 눈방울이 퍽 보기 좋아 중간에 끊지도 못하고. 요한은 입을 뻐끔댔지만 끝까지 모른 척 하며 갈 채비를 하자 그는 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내일 봐요."
테오도 고개를 작게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왠지 모를 다급한 발걸음으로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요한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작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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